한성 손재한 선생 일대기

한성 손재한 선생은 황해도 연백에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고(1922년생) 본관은 밀양이며 대대로 황해도 연백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백부가 모든 가산을 정리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면서 형편이 어려워졌고, 용도보통학교 졸업 후 해주공립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으나 졸업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 강제징병 1기생으로 징병되면서 만주 하얼빈 부대에 배치되어 만주 땅에서 소련군과 대치하며 전쟁터를 전전하였습니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소련군에 무장해제를 당한 후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로 끌려갔지만, 소련 극동군 사령관의 여행증을 천신만고 끝에 발부받아 단동에서 걸어서 압록강을 건너고 평안도를 지나 구사일생으로 38선을 넘어 고향으로 왔습니다.

무사히 귀향하였으나 국내 상황은 혼란스러웠고, 나라는 가난하여 하루하루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선생은 철기 이범석 장군이 이끌던 조선민족청년단에 가입하여 단원의 일원이 되어 청년운동을 하였으나,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선생으로서는 김일성의 공산당 치하에서 살 수는 없었기에 정든 고향 연백을 떠나 피란 길에 올랐습니다.

피란살이 모진 고생을 다 했지만, 선생은 1950년부터 ① 대륙사 ② 세운상가주식회사 ③ 주식회사파고다아케이드 ④ 광야개발주식회사 ⑤ 주식회사월드타워 등 5개사를 설립 운영하였습니다.
60년 동안 기업보국의 길을 걸어오면서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의 사랑에 항상 고맙게 생각하여 보답의 길을 모색해 왔고 대한민국 국운 중흥의 길에 보탬이 되고자 재단법인 한성손재한장학회를 설립(2013. 3. 14. 설립인가)하였습니다. 노벨상을 염원하며 현재 노벨상 꿈나무인 한성 노벨 영⦁수재 장학생 180명을 매년 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3년 12월 어느 날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이 노벨과학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내가 이를 촉진하기 위해 현금 40억 원을 무상출연하여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오기를 고대하며 한성손재한과학상을 만들고자 한다."고 천명함으로써 노벨과학상 수상자 특별포상을 정관에 기재한 첫 공익법인 재단이 되었습니다. 또한 2018년에는 젊은 과학자를 위한 한성과학상도 제정하여 매년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습니다.

한성 손재한 약력

  • 1922년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봉남리 출생
  • 1944년 일제의 조선인 징병제 시행에 따른 강제징병
  • 1945년 일제패망, 조국광복에 따른 귀향
  • 1948년 조선민족청년단 활동, 연백군 책임자
  • 1954년 대륙사 설립, 성수동 공장신축 및 섬유사업
  • 1966년 세운상가 신축에 최대 토지주로서 참여
  • 1967년 세운상가 관리 회장
  • 1970년 파고다 아케이드 건축, 광야개발 설립, 양평동 공유수면 매립사업
  • 1996년 주식회사 월드타워 설립, 잠실 월드타워빌딩 신축(지상 20층, 지하 6층)
  • 2013년 한성손재한장학회 설립(664억 무상출연)
  • 2013년 한성손재한과학상(본상) 제정(현금 40억 무상출연)
  • 2014년 제1기 한성 노벨 영⦁수재 장학생 179명 선발
  • 2018년 한성과학상(징검다리상) 제정(총상금 1.5억 원 매년 지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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